Image: Inigo Philbrick. Image courtesy Patrick McMullan.
이니고 필브릭은 한때 잘 나가던 젊은 아트딜러였습니다. 미국의 알드리치 미술관 관장이었던 아버지를 통해 일찌감치 미술을 만났고, 런던의 명문 대학인 골드스미스를 졸업한 필브릭은 여러모로 준비된 인재처럼 보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런던의 메이저 갤러리인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인턴십을 통해 미술계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이미 야심과 능수능란함을 보여주던 필브릭을 눈여겨 본 화이트큐브의 갤러리스트 제이 조플링이 그에게 아트딜러로 성장할 수 있는 조언과 발판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필브릭은 24세의 나이로 런던에 자신의 갤러리를 오픈하고 마이애미에도 분관을 내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프라이빗 제트기를 타고 유럽 휴양지의 빌라를 통째로 빌려 파티를 여는 럭셔리한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그와 어울리던 부유한 고객들이 미술작품 투자를 캐묻지 않고 맡기기 시작합니다. 그가 거래했던 장-미셸 바스키아, 루돌프 스팅겔, 크리스토퍼 울과 같은 블루칩 아티스트의 가격대가 치솟고 있었던 당시가 좋은 시절이었지요.
그가, 선을 넘은 것은 어느 순간이었을까요.
수요가 큰 작품을 끊임없이 재판매를 하여 차익을 얻는 2차 시장의 관습을 익힌 필브릭은 위험한 베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작품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받거나 이미 판매한 작품을 고객에게 알리지 않고 두번 세번씩 다시 판매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고가 작품의 분할투자를 부추기는 수법으로 한 작품을 400퍼센트 이상 팔아 이익을 취했습니다. 연쇄대출과 사기 행각이 빈틈없이 이어졌다면 그의 행각이 드러나지 않았겠지만, 일순간 그의 모래성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고객들이 자신이 지불한 것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고소했습니다. 투자자와 고객에게 1000억 원 이상의 피해를 입힌 금융사기로 필브릭에게 수배가 내려지게 되지요. 해외로 도피했던 필브릭이 2020년 6월, 남태평양의 바누아투에서 붙잡혔습니다. 검거망을 피해서 간 곳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휴양지였습니다.
지난 주에 뉴욕 연방법원 재판에 선 필브릭은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최대 20년의 형기를 받을 수도 있게 되는데요. 이 법정에서 미술품 거래에 대한 느슨한 감시와 사기 방지 대책 미비가 거론되면서 미술 시장이 퇴폐적으로 변질되어 있다고 지적되었는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술 시장의 참여자들이 모두 필브릭과 같은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미술품 거래에 신중함을 기해야한다는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모습 뒤에는 그렇게 포장하고 가려야하는 초라한 실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